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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bert Fludd, 〈Black Square〉

10월 9일
3분 분량
Robert Fludd, Black Square, 1617
Robert Fludd, Black Square, 1617

하늘과 땅, 별과 인간도 존재하지 않던 원초의 세계를 어떻게 시각화할 수 있을까. 1617년 영국의 철학자 로버트 플러드(Robert Fludd, 1574–1637)는 『대우주와 소우주의 형이상학적, 자연학적, 기술적 역사(Utriusque Cosmi Maioris scilicet et Minoris Metaphysica, Physica atque Technica Historia)』에서 우주가 창조되기 이전의 상태를 이미지로 표현하고자 했다. 그는 모든 형상의 근원이 되는 원초적 물질, 즉 제1질료의 개념을 바탕으로 아직 구체적인 형태가 나타나지 않은 혼돈의 상태를 검은 화면으로 제시했다.


도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거대한 검은 사각형이다. 여기서 검정은 사물을 묘사하기 위한 색채가 아니라 빛과 물질이 아직 분화되지 않은 상태를 나타낸다. 눈에 보이는 대상을 재현하는 일반적인 이미지와 달리 플러드는 가시적인 형태가 생겨나기 이전의 세계를 시각화하고자 했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형상이 없는 상태를 표현하기 위해 선택한 것이 가장 단순한 기하학적 도형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무한한 공간을 유한한 지면에 담아야 하는 이미지의 물리적 조건에서 비롯되는데, 아무리 끝없는 세계를 표현하더라도 인쇄된 이미지는 종이 위에서 경계를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플러드는 바로 그 경계에 문장을 새겨 넣었다. 사각형의 가장자리를 따라 적힌 라틴어 ‘Et sic in infinitum’은 ‘그리고 이와 같이 무한히’, 즉 ‘끝없이 계속된다’는 뜻이다. 시각적으로는 검정이 끝나는 자리지만, 언어는 그 너머에도 공간이 이어지고 있음을 암시한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사각형 바깥의 여백이다. 아무것도 인쇄되지 않은 이 영역은 문장의 의미에 따라 무한한 공간의 일부로 읽힐 수 있다.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검게 채워진 내부뿐이지만, 그 바깥의 세계는 관람자의 상상 속에서 확장된다. 이처럼 플러드는 이미지가 멈추는 지점에서 언어를 작동시킴으로써 유한한 지면에 무한한 세계를 담아내고자 했다.


화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또 다른 특징이 발견된다. 언뜻 균일한 검정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촘촘하게 교차하는 수많은 선과 미세한 농도 차이가 드러난다. 플러드의 저서에 수록된 도판 제작은 당대의 판화가 마테우스 메리안(Matthäus Merian the Elder)이 관여했으며, 검은 화면 역시 선을 조밀하게 중첩하는 판화 기법으로 구현되었다. 형상이 드러나지 않는 상태를 표현하기 위해 오히려 화면을 빽빽하게 채운 것인데, 이는 개념적으로 형상이 부재한 세계를 나타내는 검은 사각형이 실제로는 수많은 선과 제작 과정이 응축된 이미지라는 점에서 역설적이다. 다만 이 검정을 완전한 ‘무(無)’로 이해하는 데에는 주의가 필요하다. 플러드의 우주론에서 검정은 모든 존재가 사라진 공백보다 빛과 어둠, 물질과 형상이 아직 분화되지 않은 원초적 상태를 의미한다. 따라서 검은 사각형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세계보다 구체적인 형상이 출현하기 이전의 세계에 가깝다. 별과 지구, 인간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지만, 그 안에는 앞으로 형성될 모든 존재의 가능성이 잠재되어 있다.


한편 이 도판은 카지미르 말레비치(Kazimir Malevich)의 〈검은 사각형(Black Square)〉을 떠올리게 한다. 플러드의 저서가 출간된 1617년과 말레비치가 작품을 처음 공개한 1915년 사이에는 약 300년의 간격이 있다. 흰 바탕 위에 놓인 검은 사각형이라는 외형적 유사성 때문에 플러드의 도판은 종종 말레비치보다 300년 앞선 검은 사각형으로 소개되기도 한다. 그러나 두 이미지의 외형적 유사성은 미술사적 연속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플러드의 검정은 창조 이전의 우주라는 비가시적 개념을 설명하기 위한 우주론적 도상인 반면 말레비치의 〈검은 사각형〉은 20세기 초 아방가르드와 절대주의의 맥락에서 재현적 회화의 관습을 벗어나 새로운 회화적 질서를 제시한 작품이다. 두 이미지는 유사한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제작 목적과 역사적 배경에서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따라서 플러드의 도판을 현대 추상미술의 선구적 사례로 규정하기보다는, 서로 다른 시대에 비가시적인 세계와 비재현적 회화에 대한 탐구가 어떻게 동일한 기하학적 형태로 나타났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두 이미지를 나란히 살펴보면 하나의 흥미로운 질문이 제기된다. 서로 다른 시대에 재현하기 어려운 대상을 시각화하려는 시도가 어떻게 검은 사각형이라는 동일한 형태에 도달했는가 하는 것이다. 플러드에게 이 도형은 창조 이전의 형상 없는 세계를 의미하며, 그 안에는 앞으로 출현할 모든 존재의 가능성이 잠재되어 있다. 이러한 검정은 원초적 혼돈을 가시화하는 동시에 우주의 시작을 예고한다. 그런 의미에서 플러드의 도판은 아무것도 남지 않은 마지막 이미지가 아니라, 아직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은 최초의 이미지에 가깝다.


글: 정미주

(이미지문화 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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